박 차장에게
자네 편지를 받고 한참 생각했네.
바로 답장을 하지 못한 것은 자네의 선택을 가볍게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네. 이 문제에 즉각 응답하는 것은 불에 석유를 붓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잠시 시간을 두었네.
브랜드 런칭을 전면 재검토한다는 것은, 그 브랜드를 기획한 사람들에게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일이지. 아니, 사형선고일세. 브랜드를 처음부터 기획한 사람이 런칭 직전에 스스로 멈춰 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무엇보다 나는 자네가 런칭의 심각성을 사장님께 직접 보고했다는 점을 먼저 인정하고 싶네. 한때 그 회사에 몸담고 있던 임원으로서, 자네가 회사의 심각한 재정적 손실을 막아 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생각하네. 자네가 그 보고를 하지 않았다면 회사는 더 큰 비용을 치렀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박 차장.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의심의 꼬리가 자꾸 눈에 거슬리네. 과연 자네는 이 사태가 벌어질 것을 지금까지 정말 몰랐을까. 나도 브랜드 몇 개를 런칭했던 사람으로서, 이 정도의 조짐은 적어도 두 달 전에는 이미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자네를 부끄럽게 하려는 말은 아닐세. 자네와 솔직하게, 영혼 대 영혼으로 마주 보며 말하고 싶은 것이네.
자네는 시장조사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시장의 움직임을 관찰해 왔지. 런칭 석 달 전에도 최종 조사를 하지 않았나. 내 기억으로는 그때 이미 소비자의 태도가 움직이고 있었네. 그런데 자네는 그 결과 보고서에서 그 조짐을 특정 계층의 취향일 뿐이라고 정리했지.
내가 자네와 함께 일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이런 결과가 나오면 보통 자네는 나에게 집요하게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고 말하던 사람이었네.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그냥 넘어갔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네.
나는 자네가 개인적으로 소비자 취향의 변화를 다시 조사했으리라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자네는 기획 의도와 다른 수치가 나오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일세. 그런 수치를 그대로 넘겼을 리 없다고 생각하네.
물론 런칭 일주일 전에 자네가 사장님께 전면 재검토를 요청한 것이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기획자의 실수를 스스로 발견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재점검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인지는 나도 알 수 없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요청을 하기 전에 이미 많은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네. 그래서 나는 솔직히 궁금하네. 왜 자네는 이 문제에 대해 나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는가. 솔직히, 나도 그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네.
박 차장. 내가 이렇게 혼자 가설을 세워 놓고, 자네에게 그중 하나를 고르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네. 자네가 이 편지를 읽으며 어떤 기분이 들지도 짐작하네. 하지만 자네가 진정으로 나를 멘토라고 생각하고, 사표 결정까지도 나에게 조언을 구했던 사람이라면, 우리 사이에는 이 정도의 이야기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지금 자네는 런칭을 중지해서 30억 원의 추가 손실을 막았다는 사실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이미 투자한 10억 원의 비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일어서기 어려울 정도로 자괴감에 빠진 팀원들의 사기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네는 자네의 성향과 시장의 징후를 종합했을 때, 이런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네. 알려고 노력했어야 했고, 어쩌면 알 수도 있었네. 내 생각에 자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시했거나 무시하려고 노력한 것이지.
이 말이 지나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자네를 비난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네. 왜냐하면 나도 6년 전에 그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네. 자네와 비슷한 상황에서, 나도 비슷한 행동을 했네.
그때 나는 몰랐다고 말하고 싶었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몰랐던 것이 아니었네.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 정확히 말하면, 내가 기획한 브랜드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네.
그래서 지금 자네의 행동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던 것일세. 나는 자네의 실수를 지적하기 위해 내 실수를 꺼내는 것이 아니네. 자네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더 깊은 실패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실수를 다시 꺼내는 것이네.
만약 정말 몰랐다면 그것은 무능에 가까운 일일세.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면 잔인한 일이고, 알았지만 부인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자기기만에 가까운 일일세.
이 말은 자네를 몰아세우기 위한 말이 아니네. 브랜드 런칭을 맡은 사람은 자기 확신보다 먼저 시장의 징후 앞에 정직해야 한다는 뜻일세. 기획자는 자기 아이디어를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시장의 말을 듣지 못하면 안 되네.
지금부터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작은 실수가 큰 실패가 되지 않도록 다시 재점검하고 준비하는 것이네. 그것만이 경영자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 그리고 자네 자신을 위한 최선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네. 그렇다고 자네가 팀 앞에서 자신의 실수를 고해성사하듯 털어놓으라는 뜻은 아니네. 오히려 그럴 경우 혼란과 불신만 커져서 브랜드 런칭팀이 공중분해될 수도 있네. 나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지금 필요한 것은 고백보다 점검일세. 일단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네.
그 처음은 런칭 시점이나 캠페인 방식이 아니네. 시장 욕구에 대한 반응으로 만든 이번 트렌드성 강한 브랜드를 계속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멈추고 다시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일세. 먼저 그 질문에 답해야 하네.
기획부터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네. 그러나 런칭 시점을 뒤로 미루거나 런칭 방법을 바꾸기 전에, 먼저 기획의 시작부터 점검해야 하네. 우리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지 않으려 했는지, 어떤 데이터를 취향으로 축소했고, 어떤 징후를 예외로 처리했는지 다시 봐야 하네.
브랜드 런칭의 실패는 대개 런칭 당일에 오지 않네. 실패의 징후는 오래전부터 온다네. 문제는 시장이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획자가 듣지 않은 것일 때가 많네. 참고로 나는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네. 그래서 자네는 꼭 그렇게 하길 바라네.
이번 일을 자네의 실패로만 남기지 말게. 지금 멈춘 것은 아직 끝났다는 뜻이 아닐세.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브랜드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르네. 그러니 이번에는 자네의 아이디어를 지키려 하지 말고, 브랜드가 처음부터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을 지키게. 그럼 수고하게.
P.S. 한 가지만 덧붙이겠네.
자네가 이번 일에서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런칭의 연기 여부가 아닐세. 자네가 시장의 징후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네. 브랜드도 사람도 위기 앞에서 자기 품질을 드러내네. 좋은 기획자는 자신의 기획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기획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신호 앞에서도 정직할 수 있는 사람일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