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차장에게
오늘도 민트 향이 너무 강하더군.
몇 달 전 집 근처에서 ‘Tea Tone’이라는 작은 찻집을 발견했네. 시애틀로 옮겨 온 지 거의 1년이 되어 가는데, 왜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역시 사람은 자신이 찾기 시작한 것만 보게 되는 모양이네.
아메리카노 더블샷 외에는 다른 음료를 거의 마시지 않던 내가 민트차를 찾게 된 것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다는 아내의 잔소리 때문이었네. 처음에는 마지못해 주문했는데 생각보다 맛이 좋았어. 향은 맑았고, 끝에는 약간 쌉싸래한 맛이 남았지.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그 찻집에 가서 민트차를 마시는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었네.
그런데 몇 주 전부터 맛이 달라졌네. 민트 향은 너무 강하고 끝맛은 필요 이상으로 쓰더군. 처음에는 내 입맛이 변한 줄 알았네. 다음 주에 다시 가 보았고, 그다음 주에도 다시 주문했지. 그래도 맛은 돌아오지 않았네. 아내도 같은 이야기를 했고, 함께 간 친구도 차가 전과 다르다고 하더군.
결국 주인에게 물었네. 전에 차를 우리던 매튜가 그만두었다고 하더군.
찻잎도 같고, 물도 같고, 찻잔도 그대로라는데 맛은 전혀 달랐네. 레시피도 남겨 두었다고 했지만, 매튜가 우리던 차는 아니었지.
나는 그날 차를 마시며 한참 생각했네. 매튜가 특별히 차를 잘 우린 것일까. 아니면 찻집이 매튜에게만 의존했던 것일까. 그가 자신의 방법을 제대로 알려 주지 않고 떠난 것일까. 아니면 찻집이 그에게서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처음에는 매튜가 아쉬웠는데, 생각할수록 찻집이 더 궁금해지더군.
박 차장.
자네가 보낸 메일은 잘 읽었네.
기존에 하던 업무만으로도 벅찬데, 벌써부터 내년 상반기 전략 어젠다와 마케팅 아이디어까지 제안하라는 이 부장의 지시가 부담스럽다고 했지. 자네가 메일에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문장 사이에 이런 질문이 있는 것 같았네.
‘왜 그것까지 제가 해야 합니까.’
어쩌면 이런 생각도 했겠지.
‘그렇다면 이 부장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자네가 쓰지 않은 다른 문장도 나는 읽었네. 먼저 움직이면 독단적이라고 하고, 기다리면 왜 주도적이지 않으냐고 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 그런 실수를 할까 두렵다는 것. 자네가 쓰지 않았어도 그건 들리더군.
충분히 그럴 수 있네. 책임은 늘어나는데 권한은 그대로라면 누구라도 억울할 수 있지. 전략을 고민하라고 하면서 정작 중요한 결정은 위에서 한다면, 자네가 이것을 육성이 아니라 책임 전가로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세. 그래서 나도 바로 답장을 쓰지 못했네.
이 부장이 자네를 키우려는 것인지, 자신의 일을 자네에게 넘기려는 것인지 내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네. 둘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비슷하거든. 일을 맡기는 방식만으로는 좀처럼 구분하기 어렵지.
다만 나는 이번 일을 자네의 업무가 하나 더 늘어난 것으로만 보지는 않았으면 하네. 작년 하반기 2차 프로모션 때를 기억하나.
이 부장이 중국 출장 중이었고, 하필 출장 지역에 지진이 나서 휴대전화도 이메일도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지. 프로모션을 예정대로 진행할 것인지, 사은품 물량의 차질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모두 자네가 판단해야 했네.
그리고 자네는 대체 사은품으로 양말을 선택했지. 그때 나는 적잖이 실망했네. 이 부장이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어.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자네의 판단이 무책임했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요즘은 그 일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네. 왜 하필 양말이었을까.
그 질문을 자네에게만 묻는 것이 과연 옳을까.
자네가 우리 브랜드답게 판단하기를 바랐다면, 우리는 언제 자네에게 우리다움으로 판단하는 법을 가르쳤을까. 브랜드북을 건네준 적은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무엇을 먼저 보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함께 논의한 적이 있었나.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설명했지만, 그것을 실제 선택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은 있었나.
어쩌면 우리는 자네에게 브랜드다운 결정을 기대하면서도, 그 판단의 기준은 자네 혼자 알아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양말은 자네의 실패이면서 동시에 우리 조직의 실패였을 수도 있네.
자네가 말했던 그 이중의 잣대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네. 먼저 움직이면 독단적이라고 하고, 기다리면 주도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 말일세. 기준을 준 적 없이 결과만 묻는다면, 무엇을 해도 틀린 사람이 되기 쉽지.
어쩌면 자네가 빠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는지도 모르겠네.
이 말이 자네의 판단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네. 자네는 그 자리에서 더 깊이 고민했어야 했고, 다른 대안을 찾았어야 했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세.
그러나 누군가에게 판단을 맡기려면, 그 전에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어야 하네. 브랜드는 지시문만으로 이어지지 않거든.
사람은 업무를 인수인계받을 수 있지만, 판단은 저절로 인수인계되지 않네. 나도 오래전에는 부장이 자리를 비우면 그 일을 대신 처리하는 사람이 후임자라고 생각했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일을 대신하는 것과 판단을 이어 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더군. 일을 대신하는 사람은 매뉴얼을 따라 할 수 있지만, 판단을 이어 가는 사람은 매뉴얼에 없는 순간에도 우리다운 선택을 해야 하네.
아마 이 부장은 자네에게 그 연습을 시키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네.
물론 아닐 수도 있지.
그래서 이번 일을 기회라고 낭만적으로만 받아들이지는 말게. 일이 늘어난 만큼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지도 물어보게. 자네가 전략을 제안한다면 그 제안이 어떤 과정으로 검토되는지, 자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과 권한이 주어지는지도 확인해야 하네. 권한 없는 책임은 성장이라기보다 소진에 가까울 수 있으니까.
그러나 권한이 완성될 때까지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물러서지는 말게.
박 차장, 이제 자네도 조금은 ‘정서적 월권’을 해도 될 때가 된 것 같네.
직급을 넘어서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네. 결재선을 무시하라는 말도 아닐세. 자신의 업무 범위보다 브랜드를 조금 더 넓게 걱정해 보라는 뜻이네.
내가 맡은 일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선택이 브랜드 전체에 무엇을 남길지 생각해 보는 것. 내 평가보다 브랜드의 약속을 먼저 걱정해 보는 것. 아직 내 자리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내가 그 자리에 앉는다면 어떻게 판단할지를 미리 고민해 보는 것 말일세. 나는 이것을 주인의식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네.
주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맡은 일보다 브랜드를 조금 더 걱정하라는 뜻이니까.
이제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자네의 일이네.
자네는 이미 팀장급 차장일세.
업무를 정확히 처리하는 것만으로 인정받던 시기는 지나가고 있네.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네. 그렇다고 혼자 모든 답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네.
오히려 반대일세.
좋은 판단을 하는 사람은 혼자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필요한 사람에게 묻는 사람이네. 양말 사건에서 자네에게 부족했던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질문이었을지도 모르지.
시간이 없더라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우리다움을 확인하기 위해 무엇을 다시 봐야 하는지, 고객이라면 이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끝까지 물었어야 했네.
자네가 다시 그런 선택을 하게 될까 두렵다고 했지.
그 두려움을 나쁘게 여기지 말게.
이상하게도 자신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같은 실수를 다시 하더군. 다만 그 두려움에 발이 묶이지는 말게. 전략도 같은 것일세.
내년 상반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부터 생각하지 말고, 먼저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물어보게. 어떤 프로모션을 할 것인가보다, 고객이 우리를 어떤 브랜드로 기억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아이디어는 그다음에 나와도 늦지 않네. 전략을 만든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많이 제안하는 일이 아니네.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먼저 결정하는 일이네. 우리 기업들은 사람을 뽑는 데는 참 많은 힘을 쓰네. 그런데 그 사람이 떠난 뒤에 무엇을 남길지는 이상하게 아무도 묻지 않더군.
사람이 그만두면 그제야 빈자리를 보고, 비슷한 경력의 사람을 채우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자리는 채워도 그 사람이 가졌던 판단까지 채워지지는 않네.
어느 회사는 중요한 자리마다 다음 사람을 미리 준비시킨다고 하더군. 처음에는 사람을 대체품처럼 다루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보네.
사람을 대신할 사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떠난 뒤에도 조직의 약속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필요할 수도 있겠다고 말이야. 다만 그 준비가 직책을 물려주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네.
그 사람이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는지, 무엇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실패했을 때 무엇을 먼저 확인했는지를 함께 남겨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이름과 직급만 바뀌고, 조직은 매번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되지.
매튜의 손끝이 사라지자 그 찻집의 맛도 함께 사라진 것처럼 말이야.
박 차장.
이번에 이 부장이 자네에게 내년 전략을 고민하라고 한 진짜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네. 자네를 준비시키려는 것인지, 단지 일이 많아서 나누려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네. 하지만 그 이유와 상관없이 자네에게는 한 번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이 부장을 대신해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부장이 없어도 우리 브랜드답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 말일세.
그러니 이번에는 전략안을 잘 만드는 것만 목표로 삼지 말게. 자네가 어떤 기준으로 그 전략을 만들었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부장에게도 물어보게.
“부장님이 자리에 없을 때, 제가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합니까?”
아마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자네가 작성할 전략안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네. 그리고 언젠가 자네가 누군가에게 일을 맡길 때는 답만 주지 말게. 자네가 어떻게 그 답에 도착했는지도 함께 알려 주게. 자네의 후임이 자네와 같은 결정을 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자네와 같은 질문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사람을 키운다는 뜻일 테고, 브랜드의 판단을 이어 간다는 뜻일세.
힘들겠지만 잘 견뎌 보게. 다만 혼자 견디지는 말게. 그럼 수고하게.
P.S.
자네가 양말을 선택했던 그날, 사실 나도 당장 더 나은 대안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네. 나는 자네의 선택에 실망했지만, 자네 혼자 결정하도록 두었던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었네.
사람에게 판단을 맡기려면 먼저 판단의 기준을 함께 만들어야 했는데, 우리는 결과를 보고 나서야 기준을 물었지.
그러니 박 차장, 이번에는 전략만 만들지 말고 기준도 만들게. 그리고 그 기준을 자네 혼자만 알고 있지는 말게.
매튜가 떠난 뒤에도 같은 민트차를 마실 수 있도록 말일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