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바라본 풍경
언제부터 그림을 좋아했습니까?
어릴 적 사진을 정리하다가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팔달산에서 제가 직접 그린 성곽 그림을 들고 서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고 알았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풍경 을 좋아했구나.’ 그때는 몰랐는데, 돌아보니 오래전부터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수원 화성이 보이는 집에서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때는 그냥 당연한 풍경이었습니다. 매일 보니까 특별한 줄도 몰랐습니다. 국사 선생님께 사도세자와 영조의 비극,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마음과 수원 화성 축성에 관한 이야 기를 들었습니다. 눈앞에 장면이 그려지는 것처럼 생생하고 인상 깊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배 경이 되는 수원 화성이 실제로 우리 집 창문 너머에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창밖 풍경이 제 기억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나무가 자라 성곽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풍경도 그렇게 조금씩 변해 갑니다.
어반 스케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창작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안정 적인 직업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림이 아닌 다른 일도 해 봤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 었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제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디 지털 작업과 달리 결과물이 손에 남는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그림 한 장을 완성하면 마음의 빈 곳이 조금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상품을 만들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펜과 수채 물감으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 을 그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보고 그렸는데도 실제와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제 내면의 필터를 거친 것처럼 어딘가 다른 풍경이 그려졌습니다.
그림은 불안을 막아 주는 방패다
그림 한 장을 완성했을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무엇입니까?
강한 몰입입니다. 평소에는 바쁘게 일상을 보내면서도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땅속으로 꺼지는 것처럼 불안감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하면 그 불안에 휩쓸리기 전에 단단한 방패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림에 집중하고 몰입하면서 마음이 안정됩니다.
손으로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제작 방식입니까?
손으로 그리는 일은 제가 살아온 시간과 지금 느끼는 감각을 남기는 방식입니다. 그림은 사진처럼 대상을 정확하게 복제하는 일이 아닙니다.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다르고, 남기고 싶은 부분도 다릅니다. 완벽함은 이미 사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림에는 그린 사람이 보고 느낀 것이 남습니다. 고객들도 제 그림에서 완벽함보다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손이 먼저 기억하는 감각
머리보다 손이 먼저 기억하는 감각도 있습니까?
오래 그릴수록 물과 물감의 농도, 붓에 물감이 스며드는 느낌에 예민해집니다. 그 미세한 차이가 그림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꾸기도 합니다. 물감은 그날의 온도와 습도에도 반응합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계속 물과 종이의 상태를 살피게 됩니다. 이런 감각은 설명을 듣는다고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그리고 실패하는 동안 손이 먼저 기억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하루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날씨가 좋으면 그림 도구를 챙겨 야외로 나갑니다. 미리 생각해 둔 장소에 가서 캠핑 의자를 펴고 자리를 잡습니다. 그렇게 눈앞의 풍경을 그립니다. 그림이 완성되면 작업실로 돌아와 스캔한 뒤 컴퓨터로 편집합니다. 이후 엽서나 굿즈로 만들 그림은 인쇄소에 제작을 의뢰합니다.
밖에서 풍경을 관찰하고 손으로 그리는 일부터 하나의 상품으로 완성하는 과정까지 모두 제 작업입니다.
오랫동안 사용하는 도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화려한 도구보다 손에 익은 도구가 좋습니다. 연필과 만년필, 붓, 팔레트, 수채화용 종이 패 드, 캠핑 의자와 물통을 주로 사용합니다. 몇 년째 모나미 만년필과 미젤로 물감을 쓰고 있습 니다. 비싼 도구라서가 아니라 오래 사용해 제 손처럼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손에 익은 도구 는 안정된 감각을 줍니다. 가끔 낯선 도구로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결국 가장 오래 사용한 도구로 돌아오게 됩니다. 좋은 도구보다 오래 손에 익은 도구를 더 믿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오래 걸리는 과정은 무엇입니까?
펜 작업을 끝낸 그림에 수채 물감으로 색을 입히는 과정입니다. 수채화는 물을 다루는 작업이라 한 번에 끝낼 수 없습니다. 젖은 종이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기에 좋은 순간이 있고, 표면이 마른 뒤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물감을 물에 풀어 색과 농도를 조절하고,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색을 겹쳐 올립니다. 그렇게 색을 켜켜이 쌓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습니다. 시간을 줄이기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 기다림까지 그림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풍경은 사라져도 그림은 남는다
왜 수원의 풍경을 계속 그립니까?
제가 가장 오래 살아온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장소를 해마다 다시 찾아가 보면 꽃이 달라지고, 가게가 바뀌고, 길도 조금씩 변합니다. 풍경은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일 조금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라진 풍경도 많습니까?
많습니다. 전시했던 갤러리도 없어졌고, 그림으로 남겼던 가게도 사라졌습니다. 드라마 촬영지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모습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그림은 남더라고요. 그림을 다시 펼치면 그때의 시간과 감정이 함께 떠오릅니다.
작가님은 풍경을 그리는 사람입니까, 기억을 남기는 사람입니까?
생각해 보니 기억을 남기는 일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매향동 골목을 그린 그림을 보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길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구매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그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했던 시간을 다시 꺼내 드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요.
여행은 끝나도 기억은 남는다
사람들은 작가님의 그림을 왜 가져갈까요?
그림보다 시간을 가져가는 것 같습니다. 수원을 여행했던 하루, 행궁동 골목을 걸었던 기억, 햇빛이 좋았던 오후를 집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여행했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그림은 그날의 기억과 느낌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의 기억을 한 조각 간직하기’라는 문장을 쓰셨습니까?
네. 그 문장이 제 작업을 가장 잘 설명합니다. 저에게 브랜드란 멋진 로고나 이름보다 고객의 삶에 남는 기억에 가깝습니다. 제가 만든 상품을 통해 수원에서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억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소중해질 수 있도록 상품의 완성도도 높이고 싶습니다.
작가님의 작업을 가장 잘 설명하는 풍경은 어디입니까?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하나 고르라면 방화수류정입니다. 방화수류정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성곽길을 산책하는 장면이 제 작업을 가장 잘 설명합니다. 특히 여름날 방화수류정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행궁동을 걷다 보면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은 풍경을 마주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순간을 엽서 한 장에 담습니다. 누군가 제 그림을 보며 그 장소를 떠올리거나 직접 찾아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것만 만들기 위하여
작품과 굿즈를 만들 때 재료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창작을 지속하는 일뿐만 아니라 환경의 지속 가능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림과 굿즈를 만들 때 종이를 주재료로 사용합니다. 플라스틱이나 비닐 소재보다 환경에 부담을 덜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이라고 해서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건을 많이 팔수록 이익을 얻는 구조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상품까지 만들어 내기 쉽습니다. 그래서 필요하지 않은 상품까지 만들어 내고 있지는 않은지 창작자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기후와 쓰레기 문
제는 이제 외면하기 어려울 만큼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오래 창작하려면 제작자로서의 양심과 책임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들지 않기로 결정한 상품도 있습니까?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마그넷과 키링은 제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최근 많이 만들고 판매하는 상품이지만, 버려질 때 재료를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가격을 맞추려면 대량으로 생산해야 한다는 점도 부담스러웠습니다. 재질이 딱딱하고 미끄러워 손으로 만졌을 때의 느낌도 제가 원하는 방향과 달랐습니다. 잘 팔릴 수 있는 상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그리기 위한 현실
소량 생산을 유지하면서 창작을 지속하려면 어떤 현실적인 기준이 필요합니까?
상품의 가격이 너무 낮으면 아무리 많이 판매해도 창작자에게 돌아오는 수익은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의 종류를 넓히는 동시에 창작자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상품도 개발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그림을 오래 그리려면 창작의 가치와 현실적인 수익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저에게 지속 가능성은 환경에 관한 문제인 동시에 계속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반 스케치는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자 그리는 것도 좋지만 같이 그릴 때가 더 즐겁습니다. 같은 풍경을 보고 그려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옵니다. 누군가는 건물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나무나 사람을 먼저 봅니다. 어반 스케치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만큼 함께 그리고 공유하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면 제가 보지 못한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을 때보다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그리는 사람들은 단순한 고객이나 마케팅을 위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같은 가치를 나누며 서로에게 새로운 시선을 열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AI가 그림을 그리는 시대입니다. 그래도 사람의 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공지능은 빠르고 능숙하게 그림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의 생각이 필요하고, 그때그때 판단하며 고쳐 나가는 섬세한 작업에는 아직 사람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앞으로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저도 호기심에 AI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조언을 구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세세한 답을 얻기도 했지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창작품은 한 사람이 자신의 몸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궤적을 담은 결과물입니다. AI는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지만 제가 살아온 시간을 대신 그릴 수는 없습니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사람마다 기억하는 장면이 다릅니다. 그 차이는 기술이 아니라 삶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AI가 작가님의 그림을 완벽하게 모방한다면, 끝내 따라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그 풍경을 바라보며 살아온 시간입니다. 어릴 때 창문 너머로 바라본 수원 화성, 팔달산에서 성곽을 그렸던 기억, 해마다 달라지는 골목을 걸었던 시간이 제 그림 안에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 비슷한 그림은 만들 수 있겠지만, 왜 그 장소를 바라보았고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었는지까지 똑같이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끝까지 자기 손의 힘을 믿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많습니다. 하지만 제 그림은 지금의 제가 그릴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림입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제 그림을 계속 그리는 사람, 자신만의 시선과 개성을 잃지 않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제 그림을 보고 말해 준다면 좋겠습니다.
“이 풍경 속에 한 번 가 보고 싶다.”
“이곳에서 살아 보고 싶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