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차장에게
기우였던 모양이네. 지난여름이 너무 더워서 이제는 봄과 가을이 정말 사라지는 것 아닐까 걱정했거든. 그런데 며칠 전부터 아침저녁 공기가 달라졌네. 나뭇잎도 조금씩 얇아지는 것 같고, 아침에 밖에 나갈 때는 가디건 하나쯤 챙겨야 할 것 같은 날씨가 되었네.
가을은 참 이상하네. 아직 아무것도 완전히 변하지 않았는데, 곧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먼저 알게 하거든. 오늘 오후에는 민트차 한 잔을 마시면서 그동안 사놓고 읽지 못했던 책들을 좀 펼쳐볼 생각이네. 차와 책이라면 가을을 보내는 꽤 괜찮은 방법 아닌가. 물론 그전에 자네가 보내온 신제품 슬로건부터 봐야겠지만 말이야.
박 차장.
이번 기획안은 꽤 좋았네. 사실 조금 당황했네. 실망해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좋아서 말일세. 그동안 자네에게 잔소리를 꽤 많이 했지 않은가. 그래서 자네가 새 기획안을 보냈다는 메시지를 보고 이번에는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잠깐 걱정했네. 그런데 그것도 기우였던 모양이네.
몇 개의 슬로건은 내가 다시 써도 그보다 낫게 만들 자신이 없더군. 그래서 자네에게“내 의견이 정말 필요하겠나?”라고 답한 것은 겸손해서가 아니었네.
조금 두려웠거든. 자네가 성장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예전만큼 시장을 날카롭게 보지 못하게 된 것인지 순간 구분하기 어려웠네. 나이가 들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이것인 것 같네. 자신의 경험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아직도 자신의 감각이 정확하다고 믿는 것. 그래서 이번에는 나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네. 내가 괜한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끝까지 하나가 마음에 걸렸네. 자네의 슬로건은 좋았네. 제품의 장점도 잘 드러났고, 소비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말도 있었네. 솔직히 나도 순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
그런데 몇 번 읽다 보니 이런 질문이 생기더군. 우리는 왜 이렇게 경쟁사를 많이 보고 있을까. 좋은 카피라는 생각과 동시에, 너무 경쟁사를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네. 경쟁사의 약점을 드러내고, 그들이 비싸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는 그보다 합리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네. 틀린 전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네.
때로는 비교가 아주 효과적일 수도 있지. 경쟁사를 통해 시장의 기준을 알 수 있고, 고객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도 볼 수 있으니까. 코카콜라와 펩시도 오래 서로를 비교했네. 자동차 브랜드들도 그랬고, 배송 회사들도 그랬지. 그런 광고는 보는 재미도 있네. 누가 누구를 비꼬았는지, 누가 더 영리하게 받아쳤는지를 보는 재미 말일세.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광고는 기억나는데 브랜드의 이유는 남지 않는 경우가 있더군. 누가 누구보다 나았는지는 기억나는데, 그래서 너는 누구인가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지.
박 차장.
나는 비교광고 자체를 반대하지 않네. 경쟁사를 보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네. 오히려 경쟁사는 중요하네. 다만 경쟁사를 보는 것과 경쟁사를 기준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일세.
경쟁사를 보는 것은 관찰이지만, 경쟁사를 기준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의존이네. 이 차이가 작아 보여도 브랜드에서는 꽤 크다고 생각하네.
특히 자네가 메인 슬로건 아래에 가격을 강하게 배치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네. 우리 제품이 더 저렴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네. 그런데 비교를 시작하는 순간 소비자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비교까지 함께 시작하거든.
왜 더 싸지. 대신 무엇이 부족하지.
저 브랜드에는 있고 여기에는 없는 것이 무엇이지.
가격 하나를 비교했는데 소비자의 머릿속에서는 품질, 역사, 신뢰, 디자인, 서비스까지 함께 비교되기 시작하네. 우리가 경쟁사의 약점을 보여주려다가 오히려 경쟁사의 장점을 불러오는 셈이지. 물론 이것도 내 기우였으면 좋겠네.
나는 요즘 경쟁을 생각할 때 시소와 그네를 자주 떠올리네.
시소는 상대방이 내려가야 내가 올라갈 수 있지. 반대편에 앉은 사람이 높이 올라가면 나는 내려갈 수밖에 없네. 그래서 시소 위에서는 상대방을 계속 봐야 하네. 저 사람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얼마나 내려갔는지, 내가 지금 더 높은지 낮은지.
경쟁사를 기준으로 브랜드를 운영하기 시작하면 비슷한 일이 벌어지네.
상대가 가격을 내리면 우리도 내려야 할 것 같고, 상대가 광고를 많이 하면 우리도 더 해야 할 것 같고, 상대가 새로운 기능을 내놓으면 우리도 무엇인가를 하나 더 붙여야 할 것 같지. 계속 상대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왜 그 시소에 앉아 있는지도 잊어버리게 되지.
그런데 그네는 조금 다르네.
그네를 높이 타려면 옆의 그네를 끌어내릴 필요가 없네. 자기 몸의 리듬을 알아야 하지. 언제 다리를 펴고, 언제 몸을 당기고, 어느 순간 힘을 더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반동으로 바꾸는 것이지. 나는 브랜드의 경쟁도 그네에 가까웠으면 하네.
상대방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기보다, 자신이 가진 힘을 어떻게 더 멀리 보낼지를 고민하는 것. 경쟁사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보다 자신의 강점에 더 많은 추진력을 붙이는 것. 나는 그것이 더 오래가는 경쟁이라고 생각하네.
시소의 문제는 하나 더 있네.
아무리 잘 타도 일정 높이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네. 상대의 높이가 곧 내 높이의 한계가 되기 때문이지. 경쟁사를 기준으로 만든 브랜드도 그렇네. 결국 경쟁사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네.
상대보다 조금 싸고, 조금 빠르고, 조금 편하고, 조금 더 좋은 브랜드가 될 수는 있지. 하지만 그 시장 자체를 다르게 보게 만드는 브랜드가 되기는 어렵네. 경쟁사가 나의 기준이 되었으니까.
박 차장.
그래서 나는 자네에게 이번 슬로건을 버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네. 오히려 잘 만들었기 때문에 한 번 더 고민해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네.
이 슬로건이 경쟁사를 이기는 말인지, 아니면 우리를 더 잘 보여주는 말인지.
둘은 같지 않네.
좋은 광고는 경쟁사의 약점을 설명하기보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자네도 이번 기획안을 다시 보면서 한 번 물어보게. 이 광고를 본 소비자가 경쟁사의 단점을 기억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생각을 기억하기를 원하는가.
가격이 싸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왜 우리가 이 제품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기억하기를 원하는가.
광고가 끝난 뒤 사람의 머릿속에 하나만 남길 수 있다면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나는 그 질문부터 다시 해보았으면 하네.
모든 전략은 결국 최적화의 문제라고 생각하네. 광고도 그렇고, 신제품 개발도 그렇고, 매장의 위치를 고르는 일도 그렇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최적화하느냐일세.
매출을 최적화할 수도 있고, 클릭을 최적화할 수도 있고, 판매량을 최적화할 수도 있지. 경쟁사보다 좋아 보이는 것을 최적화할 수도 있네. 하지만 브랜드 담당자라면 하나를 더 물어야 하네. 이 선택은 우리다움을 얼마나 더 선명하게 만드는가.
나는 그것이 브랜드가 해야 할 최적화라고 생각하네.
그래서 이번 슬로건을 다시 한번 우리 브랜드의 중심에 놓고 읽어보게. 경쟁사를 지우고 읽어보게. 가격을 지우고 읽어보게. 제품 기능도 잠시 지우고 읽어보게.
그래도 남는 말이 있는가.
그래도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느껴지는가.
경쟁사가 없어도 이 말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마지막 질문이 꽤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경쟁사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슬로건이라면,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경쟁사가 만들어준 말일 수도 있으니까.
박 차장.
브랜드에는 자아실현이라는 표현이 조금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나는 브랜드도 결국 자신이 무엇인지 세상에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네. 남보다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되는 것.
경쟁보다 어려운 일이지. 경쟁은 상대방을 보면 되지만, 자기다움은 자신을 계속 들여다봐야 하니까. 그래서 더 오래 걸리고, 더 어렵네. 하지만 한번 찾으면 쉽게 흔들리지도 않지.
오늘 아침 밖에 나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네. 가을이 좋은 이유는 여름보다 덜 덥기 때문이 아닐세. 겨울보다 덜 춥기 때문도 아니고. 가을은 누구보다 낫기 때문에 좋은 계절이 아니네. 그냥 가을답기 때문에 좋네.
박 차장.
브랜드도 그랬으면 하네. 경쟁사보다 싸서 좋은 브랜드가 아니라, 경쟁사보다 빨라서 좋은 브랜드가 아니라, 경쟁사보다 무엇인가 하나 더 있어서 좋은 브랜드가 아니라, 우리다워서 선택되는 브랜드. 이번 슬로건에서 나는 그 말을 조금 더 듣고 싶네. 그럼 수고하게.
P.S.
이 편지를 쓰고 나니 나도 조금 찔리는군.
브랜드 컨설팅을 하다 보면 나 역시 경쟁사의 사례를 먼저 펼쳐놓을 때가 많거든. “저 회사는 이렇게 했고, 저 브랜드는 저렇게 했다.”
아마 그것도 필요한 일이겠지.
다만 남의 답을 오래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자기 질문을 잊어버리게 되더군.
그러니 이번에는 경쟁사 자료를 잠시 덮어두고 다시 써보게.
경쟁사가 없어도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그 문장이 나오면 나에게도 다시 보내주게. 이번에는 정말 내가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