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차장에게
자네 메일을 받고 첫 문장을 쓰는 데 이틀이 걸렸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노트에 몇 줄 적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했고, 자네가 보낸 메일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네.
답장이 늦어진 이유는 단순하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일세. 그래도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네.
자네는 메일에서 왜 내가 브랜드 론칭 과정에서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지. 내가 알고 있는 유통 관계자들에게 부탁했다면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매장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고, 자네가 그 브랜드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고 있었다면 실패할 가능성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텐데 왜 말리지 않았느냐고 했네.
직접 그렇게 쓰지는 않았지만 원망도 조금 섞여 있더군. 그 마음은 이해하네.
이제야 말하지만 자네가 런칭을 준비하던 동안 메일을 보내올 때마다 나도 몇 번이나 답장을 썼네. 그런데 보내지는 않았어. 이유는 하나였네.
그때의 자네에게는 내 조언이 별로 필요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일세. 자네는 이미 결정한 상태였고, 이미 달리고 있었네. 정말 궁금해서 내게 묻는다기보다 자네가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 내가 거기에 몇 마디를 더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네. 오히려 자네가 직접 부딪혀 보아야 알게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네. 물론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네.
실패하고 난 사람에게“나는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만큼 비겁한 말도 없으니까. 그러니 나는 자네에게 내가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네. 나도 몰랐네. 다만 불안했을 뿐이지. 그리고 그 불안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네.
박 차장.
지금 돌아보면 자네 브랜드 런칭이 어려움을 겪은 가장 큰 이유는 플랜 A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던 것 같네. 시장 분석이 부족해서도 아니었고, 경쟁사를 충분히 보지 못해서도 아니었네. 자네가 내게 보여 준 런칭 보고서는 꽤 잘 만들어져 있었어. 시장 분석도 있었고, 경쟁 브랜드도 있었고, 포지셔닝 전략과 프로모션 계획도 있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고서를 다 읽고 난 뒤 하나가 남지 않더군. 왜 자네가 이 브랜드를 해야 하는가. 그것이었네.
왜 꼭 이 상품이어야 하는지. 왜 이미 수많은 상품이 있는 시장에 자네가 하나를 더 내놓아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는 왜 이 일을 끝까지 해야 하는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보고서에서 찾지 못했네.
나는 이것을 플랜 B라고 부르고 싶네. 사람들은 플랜 B라고 하면 플랜 A가 실패했을 때 꺼내는 차선책을 생각하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플랜 B는 그런 것이 아니네.
포지셔닝과 마케팅 전략이 플랜 A라면, 왜 이 브랜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목적이 플랜 B일세.이상하지 않은가.
알파벳 순서로 보면 B가 뒤에 있는데, 브랜드에서는 B가 먼저 있어야 하네.
무엇을 팔 것인가는 나중 문제일세.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가 먼저 있어야 하네.
자네가 이번에 만든 것은 플랜 A가 꽤 좋은 브랜드였네. 그런데 플랜 B가 없었어.
그래서 시장이 흔들리자 브랜드도 함께 흔들린 것이 아닐까 싶네.
내가 자네의 런칭을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네.
자네는 시장을 관찰한 뒤 그 안으로 들어갔네.
하지만 자네가 그 시장 안에서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확인하지 않았네. 브랜드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앞에서만 오래 버티더군. 내가 브랜드 컨설팅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도 사실 시장 규모가 아니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자기 제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네.
예를 들어 청바지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항상 양복 바지만 입고 다닌다면 나는 조금 불안해지네. 물론 청바지를 입지 않는다고 청바지 브랜드를 만들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네. 하지만 나는 묻게 되지. 왜 하필 청바지인가.
반대로 잠잘 때도 청바지를 입고 잘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지네. 그런 사람에게는 내가 무엇을 가르칠지보다 오히려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가 궁금해지거든. 그 사람은 이미 시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청바지의 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니까.
박 차장.
예전에 자네 사무실에 들렀을 때 책상을 본 적이 있네. 그때 나는 조금 놀랐어.
자네가 만들려는 상품의 샘플은 꽤 많이 놓여 있었는데, 정작 그 물건을 오래 좋아한 사람의 책상 같지는 않았네.
시장 조사 자료는 많았어. 경쟁사 자료도 있었고. 컨셉 키워드를 적은 메모도 있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상품을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더군. 나는 그 장면을 오래 기억했네.
자네는 상품을 만들고 있었지만, 아직 그 상품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네.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그 시장에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 나 역시 이런 실수를 여러 번 했네.
예전에 안경 브랜드를 컨설팅하면서 안경을 스무 개 가까이 산 적이 있었어. 내가 고른 안경, 점원이 추천한 안경, 팀원들이 골라 준 안경을 모두 써 보았네. 사람들이 어떤 안경을 처음에는 좋아하고, 어떤 안경을 결국 끝까지 쓰게 되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지. 돈도 꽤 들었네. 그런데 덕분에 중요한 것을 하나 배웠어.
사람은 남이 골라 준 얼굴보다 자신이 고른 얼굴을 오래 견디더군. 안경은 시력을 보완하는 도구지만, 동시에 자신이 어떤 얼굴로 보일지를 선택하는 물건이기도 했네. 시장조사 표에서는 배우기 어려운 것이었지. 그런 경험이 쌓이면 조금씩 상품이 보이기 시작하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지.
나는 브랜드가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네.
시장조사표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요한 관심과 반복된 관찰로 만들어지는 것. 그래서 자네에게 조금 아픈 질문을 하나 해야겠네. 자네는 정말 그 상품을 좋아했나. 그 시장이 좋아서 들어간 것인가. 아니면 그 시장이 좋아 보였기 때문에 들어간 것인가. 둘은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나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네.
좋아하는 시장과 좋아 보이는 시장. 브랜드는 그 한 글자 차이에서 아주 멀리 갈라지기도 하네.
자네가 그 상품에 정말 깊이 빠져 있었다면 아마 자연스럽게 더 많은 것을 보았을 걸세. 사람들이 왜 그것을 사고, 왜 어떤 것은 오래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은 금방 버리는지. 어떤 촉감을 좋아하고, 어떤 크기를 불편해하는지. 언제 사용하고, 언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지. 왜 필요한지뿐만 아니라 왜 필요하지 않은지도 궁금했을 것이네.
그 정도로 깊숙이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브랜드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나는 자네에게 브랜드를 다시 만들라고 먼저 말하고 싶지는 않네. 오히려 브랜드를 잊어보라고 말하고 싶네. 먼저 진짜 상품을 만들어보게. 자네가 정말 쓰고 싶은 것. 돈을 내고라도 갖고 싶은 것. 친한 사람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건네고 싶은 것.
그렇게 만들다 보면 이상하게 브랜드가 뒤에서 따라오는 경우가 있네. 반대로 브랜드부터 만들려고 하면 이름과 로고와 컨셉은 생기는데, 정작 상품은 뒤에서 허겁지겁 따라오기도 하지. 사람들은 상품 자체를 기다리고 있지 않네.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상품이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사람에게 가끔 이런 질문을 하네. 왜 세상에 이것이 하나 더 있어야 하는가.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왜 이것 때문에 자원을 하나 더 써야 하는가. 그 질문에도 답할 수 있어야 하네.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세상에 하나를 더 보태려는 이유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박 차장.
이번 일을 너무 빨리 실패라고 부르지는 말게. 나는 실수라고 부르고 싶네.
긴 시간으로 보면 실패라고 부를 만한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더군.
어떤 사건이 실패인지 아닌지는 그 사건이 끝난 직후에는 알기 어렵네.
그 사건을 다음에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이름이 바뀌기도 하니까.
자네는 이번에 성공까지의 거리와 깊이를 조금 배운 것 같네.
멀리서 보면 산 정상은 생각보다 가까워 보이지.
지도에서 보면 더 그렇고. 그런데 실제로 걸어가 보면 알게 되네.
지도에는 경사가 표시되어 있어도 숨이 얼마나 차는지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자네가 이번에 배운 것은 아마 그런 거리일세. 그러니 사람들과 모여 자책만 하고 있지는 말게. 상품을 산 사람을 만나게. 왜 샀는지 물어보게. 사지 않은 사람에게도 물어보게. 왜 사지 않았는지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네의 상품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보여주게.
“왜 이것을 사고 싶지 않습니까?”
나는 그 질문도 꽤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유를 묻는 것만으로는 브랜드의 절반밖에 알 수 없거든.
그러나 거기에서도 하나는 조심하게. 사람은 자신이 이해한 것을 너무 빨리 정답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네. 특히 보기 좋은 파워포인트에 들어간 생각은 더 위험하지.
표와 그래프, 영어로 된 컨셉 키워드가 붙으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생각도 이상하게 미래처럼 보이거든.
나도 여러 번 속았네. 아니, 지금도 가끔 속네.
그러니 문서의 완성도와 생각의 완성도를 혼동하지 말게.
말이 세련됐다고 전략이 깊은 것도 아니고, 설명이 명확하다고 시장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네.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보다 관점일 것 같네. 다시 시작하라는 말이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뜻은 아니네. 자네는 이미 한 번 걸어가 보았지 않은가. 모두가 출발선에서 지도를 보고 있을 때 자네는 한 번 길을 잘못 들어본 사람이네. 나는 그것도 경험이라고 생각하네.
자네가 정말 100년 브랜드를 만들 생각이라면 1년의 실수는 100분의 1일세.
물론 그래서 1년을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네.
반대이지. 그 1년 때문에 앞으로의 99년이 달라져야 한다는 뜻일세.
예전에 우리 팀에서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실패한 의사결정만 따로 적어보던 것을 기억하나. 나는 그 기록을 꽤 좋아했네.
성공한 것은 대부분 그럴듯한 이야기로 정리되지만, 실패한 결정에는 당시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었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거든. 이번 브랜드도 그렇게 한번 정리해보게.
무엇이 틀렸는지만 쓰지 말고, 왜 그때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는지를 적어보게.
나는 그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비즈니스에는 시험지처럼 정답과 오답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 않으니까.
99%가 왜 답이 아니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도 살아남은 1%는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 자네가 해야 할 일일세.
그리고 한 가지 더.
처음 브랜드를 런칭하는 사람은 성공만 배워서는 안 되는 것 같네. 실패의 깊이도 한번 봐야 하네. 예전에 출장 중에 아주 맑은 호수를 본 적이 있었네. 바닥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물이 투명해서 금방이라도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
그런데 실제 깊이는 생각보다 훨씬 깊다고 하더군.
그 장면이 가끔 브랜드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네.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시장일수록 깊이를 착각하기 쉽거든.
“이건 될 것 같다.”
이 확신이 강할수록 우리는 수심을 재지 않고 들어가기도 하네.
브랜드도 마찬가지일세. 확실해 보이는 시장일수록 한번 더 깊이를 재봐야 하네.
박 차장.
이번 경험에서 자네가 무엇을 배우게 될지는 내가 정할 수 없네.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꼭 남기고 싶은 것은 하나일세. 브랜드는 파는 기술만은 아니네. 자신이 끝까지 붙들고 싶은 가치를 세상과 나누는 방식이기도 하네. 그래서 브랜드 런칭의 시작점은 시장만이 아니네.
목적일세. 상품만도 아니네. 관심일세. 포지셔닝만도 아니네. 이유일세.
다음 메일에는 전략안을 보내지 않아도 좋네. 대신 이것을 써서 보내주게. 자네가 만들었던 그 상품은 자네에게 무엇이었는지. 왜 다시 만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왜 이제는 만들지 않아야 하는지. 그리고 자네가 그 상품을 통해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나는 자네의 두 번째 런칭이 새로운 컨셉에서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그 대답에서 시작되어야 하네.
이 편지를 다시 읽어보니 조금 거친 말이 많군.
몇 문장은 지울까도 생각했네. 특히 자네가 정말 그 상품을 좋아했느냐고 묻는 대목은 꽤 아플 것 같아 몇 번이나 딜리트키로 지웠다가 다시 적었어. 그래도 그냥 보내기로 했네.
지금 자네에게 좋은 말만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아무쪼록 이번 일을 브랜드 세계에서 한 발 먼저 걸어본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1년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말게. 그 1년 때문에 앞으로의 99년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자네 브랜드의 첫 번째 시간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수고하게.
P.S.
한 가지는 내가 사과해야겠네. 자네가 런칭 전에 보고서를 보여주었을 때 나는 “왜 이 브랜드를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네. 그런데 하지 않았어.
자네가 직접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지금도 그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드네.
사람이 직접 넘어져야 알게 되는 것이 있는 것은 맞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돌이 있다는 것까지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
다음에는 나도 조금 일찍 묻겠네. 자네도 다음에는 조금 일찍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
아마 브랜드의 시작은 늘 그 질문일 테니까.
그리고 정 차장에게도 안부 전해주게. 저번주에 정 차장이 중장년 프로젝트 보고서를 내가 보고 정차장에게 직접 리서치를 하라고 조언을 했었지. 그 분야에 지식이 쌓여야 비로소 신념도 생기는 법일세. 브랜드의 힘은 결국 그 사람의 신념에서 나온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그때는 제대로 답장을 하지 못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