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차장에게
런던에서 자네 메일을 읽었네.
예전 같으면 시장 조사하러 와서 매장만 몇 군데 돌고 곧장 돌아갔을 텐데, 이번에는 좀 다르군. 며칠째 공원만 걷고 있네.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햇빛을 보고, 사람들 구경이나 하고 있지. 자네는 이런 것을 시간 낭비라고 부를지도 모르겠군.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오래 일하고 나면 알게 되네. 무엇을 더 많이 보는가보다, 무엇을 천천히 보는가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지금 이 메일도 리젠트 스트리트 애플 매장에 잠깐 들어와 쓰고 있네. 그러니 길게 둘러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세. 자네 메일을 읽고 나니, 자네들이 지금 붙잡고 있는 질문은 하나뿐이더군. 시장조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맞나?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이 틀렸다고 보네.
정확히 말하면, 지금 그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야. 시장조사를 할지 말지를 두고 다시 논쟁이 시작됐다는 것은, 이미 조직 안에서 무언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거든. 상품이든, 시장이든, 자신감이든, 책임감이든 말일세.
우리 9월 런칭 브랜드를 떠올려 보세. 이제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이 시점에 정말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물어야 하지 않겠나. 런칭이 두세 달 남은 상황에서 시장조사를 꺼내는 것은 방향을 찾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대개 흔들리는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질문이 되기 쉽네.
나는 그게 마음에 걸리네.
자네도 기억하겠지. 이 프로젝트 초기에 내가 시장조사를 하라고 했던 것을. 그때 자네와 사장님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어. 좋네. 그 판단이 그때는 맞았을 수도 있지.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시장조사를 말한다면, 그건 새로운 통찰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신감이 빠지고 있다는 뜻일 가능성이 더 크네.
솔직히 말해 보세. 지금 시장조사를 하자고 말하는 쪽은 무엇을 원하는가. 정말 시장을 더 알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런칭 이후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싶은 것인가. 반대로 하지 말자는 쪽은 어떤가. 정말 확신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지금 보이는 문제를 애써 덮고 가고 싶은 것인가.
내가 왜 이렇게 차갑게 말하는지 아는가.
지금은 누가 맞았는지 따질 때가 아니기 때문이야.
자네들도 알다시피, 브랜드는 종종 시장보다 먼저 조직 안에서 무너지네. 상품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부서마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같은 말을 쓰고, 모두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각자 다른 계산을 시작하지. 나는 자네 메일에서 그 냄새를 맡았네.
그래서 말하네. 지금 필요한 것은 시장조사가 아니야.
실패를 가정한 대응 시나리오일세.
이 말이 너무 비관적으로 들리나.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것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보네. 브랜드를 런칭할 때 가장 위험한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공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거든. 특히 ‘대박’을 기대하는 사람은 더 위험하지. 나는 그 말이 정말 싫어. 역겨울 정도야. 대박이라는 말처럼 브랜드를 망치는 단어도 드물어. 대박을 기대하고 런칭하면 기대에 못 미치는 순간 조직은 실망하고, 실망은 곧 서로를 향한 비난으로 바뀌며, 비난은 브랜드를 죽이거든.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사장님을 흥분시키는 성공 보고서를 더 만드는 것이 아니네. 오히려 그 반대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단계별 대응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하네.
군대에 데프콘이 있듯, 브랜드 런칭에도 단계가 있어야 해.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
첫째, 런칭 후 첫 반응이 기대 이하일 때 어느 시점까지 기다릴 것인가.
둘째, 매출이 계획보다 낮을 때 무엇을 먼저 바꾸고 무엇은 끝까지 지킬 것인가.
셋째, 내부에서 책임 공방이 시작되기 전에 누가 어떤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할 것인가.
넷째, 상품이 문제인지, 메시지가 문제인지, 채널이 문제인지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네. 지금 시장조사를 다시 한다고 해서 이미 흔들리고 있는 마음이 단단해지지는 않아. 숫자는 더 생기겠지. 보고서도 더 두꺼워질 걸세. 하지만 두꺼운 보고서가 얇은 확신을 대신해 주지는 못해.
자네에게 하나만 더 묻겠네.
지금 시장조사를 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시장을 알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나중에 “우리는 조사까지 했습니다”라고 말할 근거를 만들고 싶은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그건 조사도 아니고 전략도 아니야. 그냥 면책일 뿐이지.
나는 이 점에서 자네가 정직해져야 한다고 보네.
사장님께도 솔직히 말씀드리게. 상품이 기대만큼 좋지 않다면 그렇게 말해야 하네. 시장 상황이 처음 예상과 달라졌다면 그것도 말해야지. 예산이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해야 하고, 팀이 자신 없어 한다면 그것도 감추지 말아야 해. 지금 가장 위험한 것은 틀린 판단이 아니네. 분명히 보이는 위험을 애써 말하지 않는 태도일세.
라틴어에 이런 말이 있지. marus aeneus conscientia sana.
건전한 양심은 청동벽이라는 뜻일세.
나는 그 말을 꽤 오래 붙잡고 살았네. 사람을 끝까지 버티게 하는 것은 근육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결국 정직이더군. 예라고 말해야 할 때 예라고 하고,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사람도 살리고 브랜드도 살리네.
박 차장,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자료가 아니야. 더 분명한 태도일세.
시장조사를 할지 말지보다 먼저, 지금 우리 조직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보게. 시장을 두려워하는가. 실패를 두려워하는가. 책임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자기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그 질문 앞에서 솔직해지면 자네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훨씬 분명해질 걸세.
내가 자네라면 이렇게 하겠네.
사장님께 보고 드리게. 지금 시점에서 시장조사를 다시 하는 것은 런칭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더 줄이는 일이 될 수 있다고. 그 대신 런칭 이후 세 단계 대응 시나리오를 만들겠다고. 기대보다 잘될 때, 기대만큼 나올 때, 기대보다 훨씬 못할 때. 그 세 경우를 나누어 상품, 마케팅, 영업, 예산, 조직 커뮤니케이션까지 다시 정리하겠다고 말하게.
그것이 훨씬 정직하고, 훨씬 실무적이며, 훨씬 브랜드다운 태도라고 나는 보네.
편지가 길어졌군. 런던 햇빛이 기울고 있어 이제 나도 슬슬 나가봐야겠네. 다음은 일본으로 갈 생각이야. 시간이 맞으면 하라주쿠에서 보세. 자네에게 일본 사람들의 브랜딩 감각이 왜 무서운지 꼭 보여주고 싶네.
그럼 수고하게.
2026년 4월, 런던에서
P.S.
한 가지만 더 덧붙이세.
자네는 늘 분석으로 문제를 풀려는 사람이었네. 그 점은 장점이지. 그런데 분석이 때로는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기보다, 정직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처럼 보이게 할 때가 있네. 숫자와 보고서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본질은 더 잘 숨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분석보다 먼저 보게.
지금 이 조직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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